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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뉴스

부사관, 전투형 강군 중심에 서다 (금성 ‘샛별고지전투’ 영웅 백재덕 이등상사와 분대원 "백병전으로 적을 격퇴하고 진지를 사수하다

총검·맨주먹으로 3차에 걸쳐 적 3개 중대 모두 격퇴

 

고 백재덕 이등상사.

태극무공훈장.

 

2012년 5월 1일은 육군에 있어 매우 뜻 깊은 날이었다. 위관급으론 처음으로 고(故) 김한준 예비역 대위에 대한 육군장이 엄수된 날이기 때문이다. 그간 육군장의 대상자는 ‘역대 참모총장을 역임한 장성, 장교로서 육군 발전에 특별한 공적을 남기고 전사·순직한 자 또는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전사한 자’ 등으로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2011년 10월 육군이 육군장 대상자 중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전사한 자’를 ‘태극무공훈장 수훈자’로 규정을 바꿈에 따라, 고 김한준 예비역 대위의 장례가 위관급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처음으로 육군장으로 치러졌다. 태극무공훈장은 군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무공훈장 중 최고로 영예로운 훈장이다.

태극무공훈장 수훈자 중 육군 출신은 총 64명으로 6·25전쟁 당시 직접 전투에 참여한 공로로 수훈을 받은 몇 안 되는 ‘전투유공자’ 중 한 사람이 백재덕 이등상사다.

백재덕 이등상사는 6·25전쟁 시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고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이 한창이던 시기의 강원도 금성(현재 김화) ‘샛별고지전투’의 전쟁영웅이다.

샛별고지는 현재 휴전선 너머의 중부전선으로 금성 서남쪽 약 5.8㎞에 위치한 직목동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길이 1㎞ 정도의 능선이 완만한 경사를 이룬 표고 470m의 무명고지다. 이곳은 주위의 깊은 계곡과 넓은 개활지가 형성돼 적에게 양호한 기동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피아간 폭격과 포격의 목표가 돼 상호 간에 접근이 곤란한 지형이다.

1953년 5월 14일 밤부터 이 고지에 대한 방어임무를 부여받은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3대대 11중대는 중공군 제67군 199사단 예하 제596연대의 2개 대대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고, 중공군은 아군진지에 대해 화력과 병력 배치상황, 지형정찰, 포로 획득을 위해 수시로 수색정찰을 하면서 동시에 샛별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격퇴됐다. 5월 15일 밤, 제11중대 3소대 백재덕 이등중사가 지휘하는 3분대는 매복조 임무를 부여받아 중대진지 앞에서 직목동 일대를 살피고 있던 중 적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신호탄으로 조명 지원을 요청했다. 60㎜ 박격포 조명탄이 발사돼 확인한 결과 적이 3개 종대로 직목동 계곡에서 43번 도로로 접근 중이었는데 3개 중대 규모의 적이었다. 이에 분대장인 백재덕 이등중사는 “여기서 적의 예기를 꺾지 못하면 중대의 주진지가 위협을 받게 된다. 우리가 뼈를 묻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니 분대원 전원은 나와 함께 이곳에서 죽기를 각오하라!”고 분대원을 독려해 전원이 중대본진으로 철수하지 않고 분대 매복진지에서 버티기로 작정했다.

적의 접근을 기다렸다가 M1 소총으로 사격을 집중하고 적이 돌격을 감행함에 따라 수류탄을 투척했다. 제1차 돌격의 15~16명이 진내로 진입하자 백병전으로 격퇴했다. 하지만 분대 9명 중 1명이 전사했다. 나머지 8명으로 재편성해 적의 차후 공격에 대비했다. 20분 정도 경과 후 적의 제2차 돌격으로 7~8명이 진내로 진입했으나 모두 사살했다. 아군도 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 이어진 적의 3차 돌격 시 10여 명이 진내에 뛰어들었으나 백재덕 이등중사를 비롯한 나머지 분대원은 사투를 벌인 끝에 총검과 맨주먹으로 모두 처치했다. 이때 중대에서 진내사격을 실시해 적의 후속 공격을 격퇴했다.

중대의 다른 진지는 주진지의 호를 오르내리며 결전을 벌였으나 백재덕 분대에서만큼은 끝내 적이 넘어서지 못하도록 사투를 벌여 분대진지를 사수했다. 분대원은 9명 중 4명이 전사하고 백재덕 이등중사를 비롯한 나머지 분대원 5명도 모두 만신창이의 부상을 당했다. 이 전투에서 백재덕 이등중사는 혼자서 격투로 적 10여 명을 처치하는 소부대 전투지휘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러한 전공이 인정돼 1954년 6월 25일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 수훈과 함께 1계급 특진됐다. 언로보도에 따르면 백재덕 이등상사(전역 계급)는 당시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인해 1954년 전역해 부산 가덕도에서 물고기를 잡았고 아내는 미역을 땄다. 정부지원은 미미했으며 7남매는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1974년에 경남 마산의 섬유공장에 취직해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다가 1988년 숨졌다.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회에서 호국영웅으로 선정했으며, 2001년에는 ‘5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2001년 부산 강서구 재향군인회는 백재덕 이등상사의 모교인 가덕도 천가초등학교 천성분교에 흉상을 건립했다. 육군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하루 앞둔 2010년 6월 24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실 내의 회의실을 ‘6·25전쟁 전승영웅실’로 명명하고 전승영웅 6인 중 한 명으로 백재덕 이등상사를 선정해 그의 조국을 위한 헌신과 군인정신을 기리고 있다.

선대들의 희생 위에 기초를 닦고 번영을 누리게 된 이 나라, 그러나 이 나라를 위해 젊음과 열정을 바친 세대는 망각 속에 사라지고 있다. 보훈은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라는 공동체에 대한 결속을 확립하기 위한 절대적인 수단이다. 국가가 사라지면 정치도 경제도 없다. 보훈정신은 곧 국가를 유지하게 하는 기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