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철원평야 주변의 DMZ 일대는 이제 빼곡한 숲으로 변화했다. 이른 아침 피어오르는 새벽안개가 DMZ의 긴장을 녹이며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철책을 따라 이동 중인 GOP경계병들
철원은 평야다. 평야의 DMZ는 산악의 그것과는 또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평지의 철책은 가파름이 없다. 산악에 비해 시각적 긴박감도 덜하다. 철책만 지운다면 한가로운 농촌 풍경이다. 하지만 DMZ는 DMZ다. 아름다운 풍광이 분단의 긴장마저 지우진 못한다. 철책 너머 수풀을 바라보는 경계병의 시선은 순간의 방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새벽의 DMZ, 평화의 기운 가득
DMZ의 새벽은 고요하다. 보이는 것은 철책을 밝히는 조명과 건너편의 암흑뿐이다. 6사단이 관리하는 평화전망대를 찾은 시간은 새벽 4시. 모두가 잠든 시간이다. 적막을 깨는 것은 아침을 맞이하는 새 울음소리뿐이다. 여명이 밝아올수록 새소리는 잦아진다. 동부전선에서 볼 수 없었던 북쪽 지평선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 너머는 평강고원이다. 평강고원은 개마고원 다음으로 높은 고지로 제주도와 같은 현무암 지대다. 농작물이 자라기 힘든 토지다. 6·25전쟁 중 북한이 그토록 철원평야를 원했던 이유다. 전망대에서 왼쪽을 보면 고암산이 보인다. 일명 ‘김일성 고지’다. 김일성이 6·25 당시 철원 탈환을 위해 직접 전투를 지휘했던 장소다. 하지만 결국 실패 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대성통곡을 했다고 하니 철원평야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평화전망대에서 보는 DMZ의 아침은 마치 아프리카의 세렝게티 같다. 초목과 수풀이 시야를 압도한다. 원래 이 지역은 농경지였다. 하지만 인간의 접근이 허락되지 않은 60여 년 동안 이곳의 생태는 완전히 변했다. 수풀이 무성해지고 늪지대가 형성됐다. 6사단 관계자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농경지가 늪지대로 변한 사례로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평화전망대 앞의 DMZ 안에는 궁예의 도성터도 자리 잡고 있다.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도성터다. 현재는 무성한 숲에 가려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원래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도선선사는 이곳으로부터 10㎞ 떨어진 지역을 선택하면 나라가 300년 이상 지속될 거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궁예는 그 말을 무시했고 결국 18년 만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역사는 세월에 묻히고 건국의 흔적은 다시 전쟁의 상흔에 지워졌다. 잦은 새 울음은 그들의 몸을 빌린 궁예의 통곡 소리가 아닐까?
●수풀이 가로막는 시야의 단절
평야의 DMZ 시선은 수평이다. 얼핏 생각하면 시야 확보가 용이할 것 같지만 여름엔 산악보다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DMZ의 거대한 수풀 때문이다. 수풀은 시야를 방해한다. 철책 앞 불모지 작업으로 정리된 지대 너머의 무성한 수풀은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당연히 관측도 어렵다. 철책에서 불과 몇십m 거리지만 수풀에 적이 은폐하면 찾기가 쉽지 않다. 경계작전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기에 적보다 낮은 지대는 경계작전에 어려움을 더한다. 육군6사단 용문산연대 ○○소초의 경우 이러한 환경을 극복하며 완벽 작전을 수행한다. 소초 관계자는 “겨울에는 시야가 확보되지만 녹음이 짙어지는 여름철에는 경계작전이 더 어려워 더 많은 집중력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여건에서 경계작전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과학화경계시스템이다. 부대는 지난해 말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병력과 편제장비, 과학화시스템으로 이뤄진 3중 체계를 갖추게 됐다. 과거 병력 위주 경계체계보다 더욱 빈틈없는 경계작전을 수행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 철원 사수의 핵심부대라는 믿음이 더해진 순간이다. ‘6·25전쟁 이후 단 한번의 적 침투도 허용하지 않은 부대’라는 사단 슬로건 역시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육군6사단 수색대대 장병들이 비무장지대 투입에 앞서 DMZ 상황조치훈련을 하고 있다. |
아침해가 떠오르자 어느새 피어오른 구름이 DMZ 능선을 타고 넘실거리며 흘러내려간다. |
●후방 펜스 뒤 농경지에선 밭 가는 농민들
○○소초는 평야 DMZ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선 소초가 평지보다 조금 낮은 곳에 위치한다. 소초 연병장은 동부전선에선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특징이다. 크지 않지만 이곳은 소초 장병들에게 휴식과 활력의 공간을 제공한다. 연병장 한쪽엔 규격을 갖춘 반면의 농구 코트도 갖춰져 있다. 이러한 공간은 소초 간 소통의 통로가 된다. 소초 관계자는 “휴일 등을 이용해 소초 대항 체육대회를 하며 상호 교류를 도모한다”고 말했다.
소초의 앞뒤를 가르는 두 철책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남방한계선으로부터 약 30m 뒤에 설치된 후방펜스 뒤쪽에는 잘 정리된 농경지가 있다. 수풀에 막힌 전방에서 뒤로 시선을 돌리면 확 트인 평야가 시야를 붙든다. 다수의 비닐하우스도 자리 잡고 있다. 이젠 도시에서 보기 힘들어진 제비들의 춤사위도 화려하다. 평야의 기름진 대지는 최전방 앞까지 농민의 발길을 이끌었다. 최전방의 긴장도 농심(農心)을 제어하지 못한 셈이다.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이 철원 특산물인 오대쌀이다. 오대쌀은 특유의 찰기로 밥맛이 좋아 인기가 많다. 예전엔 임금님 밥상에 진상됐고 현재는 청와대는 물론 한 항공사의 기내식으로 공급된다. 성분이 좋아 아이들의 이유식 기본 원료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후방펜스 뒤의 목가적 풍경은 장병들의 정신무장을 더욱 강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자신들이 지켜야할 우리 국민과 국토를 바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농업용수로 사용되던 저수지에서 먹이를 찾는 왜가리. |
●DMZ 가는 길은 근대 문화재의 보고(寶庫)
중부전선의 DMZ로 가는 길은 문화재의 보고(寶庫)다. 전술도로를 따라 곳곳에 우리 역사의 흔적이 숨어 있다. 우선 ‘관전리 민북통제소’ 앞에는 노동당사가 자리 잡고 있다. 노동당사는 전쟁 전 북한의 조선노동당 철원군 당사다. 공산 치하에서 저항하던 수많은 주민이 학살당한 비극의 현장이다. 황폐해진 건물과 여기저기 보이는 총탄 자국은 슬픈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민통선 밖에 위치한 덕에 안보관광 명소가 된 지도 오래다.
검문소를 통과해 이어지는 도로 옆으로는 근대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일제 강점기 철원군의 농산물 검사소로, 광복 후에는 양민수탈과 불순분자 색출 장소로 악용되던 ‘농산물 검사소’가 있다. 쌀 한 가마니 값이 9원, 군수 월급이 60원이던 시절 총 자산 49만 원을 보유했던 ‘제2금융조합’ 잔허도 도로 옆에서 우리의 아픈 역사와 세월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움츠렸던 과거를 딛고 비상을 꿈꾸는 근대 문화유적지도 있다. 구철원역 유적지와 월정리역이다. 이곳은 끊어진 남북의 철로, 경원선을 잇는 핵심이다. 정부는 최근 백마고지까지 이어진 경원선을 월정리역까지 잇는다는 복안을 발표했다. 이달 말 공사 착공이 보도되기도 했다. 구철원역은 원산과 평양의 중간지점에 위치한다. 일제 강점기 수도국이 있어 서울보다 상수도가 먼저 설치됐을 정도로 나름대로 번영을 구가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 남은 것은 녹슨 철로와 잡초뿐이다. 2006년 철원 군민들이 세운 ‘통일염원상징탑’만이 경원선 복원을 축하하고 있는 듯하다.
경원선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월정리역은 끊어진 철로로 분단의 상징이 된 역이다. 역 맞은편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대형 간판이 분단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간판 아래 철로에는 객차와 화차의 앙상한 잔해가 경원선의 복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월정리역의 ‘월정’이란 이름에는 현대사의 상처만큼 아픈 전설이 담겨 있다. 과거 이름 모를 병으로 고생하는 홀아비를 봉양하는 딸이 있었다. 달이 지기 전 바위에 고인 물을 천 모금 길어주면 아비의 병이 낫는다는 말에 가냘픈 손으로 천 번을 길어 결국 아비를 살렸지만 그 딸은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