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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3사단, 참전 기념행사 "’ 대신 ‘총’ 들었던 태백中 학도병의 애국심

 

1951년 1월 10일 당시 박효칠 선생의 인솔하에 경북 춘양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3사단 23연대에 자원입대한

태백중학교 학도병.

 

 

 

6·25전쟁 당시 강원 태백중학교 생존 학도병들이 지난 2일 육군3사단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 전적비’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부대제공

 

 

“처음에는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리고 쓰러져간 친구들 얼굴을 떠올리며 주저 없이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지….”

지난 2일, 육군3사단에서 거행된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 참전 기념’행사에 참석한 팔순 노병은 회고 끝에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중공군 참전 이후 아군의 전세가 어렵게 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당시 강원 태백중학교 학생들은 “내 조국을 내 손으로 지키겠다”며 참전을 결심했다. 그리고 1951년 1월 9일 새벽 학교 교정에서 박효칠 선생과 126명의 학도병들은 구국의 뜻을 결의했다.

솜바지에 개털모자, 그리고 옥수수쌀 전대를 허리춤에 차고 1월의 매서운 눈보라를 헤치며 행군하던 중 경북 봉화군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3사단 23연대 본부를 찾아가 입대를 요청했다. 당시 연대장이었던 김종순 대령은 “20세 이하의 어린 학생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으나 학생들은 키와 나이를 속이고 전원 입대를 끈질기게 요청했다. 결국 김 연대장은 학생들의 구국 의지에 감동해 입대를 허락했다.

이후 1월 14일, 녹전전투를 시작으로 군번 없이 최전선에서 싸우던 학도병들은 우수한 전투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특공중대로 재편성되고, 그해 6월 정식군번을 부여받아 간성 쑥고개 전투, 가칠봉 전투 등 더 치열한 전투에 참전하며 전공을 쌓아 갔다.

입대 후 2년 6개월 만에 총성은 멎었지만, 임무수행 중 전사해 생사를 달리한 고(故) 손길상 학우 등 18명의 학도병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생존한 태백중학교 학도병들은 산화한 전우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화백회’를 결성하고 매년 6월 1일 모교에서 기념행사를 가지고 있다.

부대는 2005년 사단사령부 안에 ‘태백중학교 학도의용군 기념비’를 세운 것을 계기로 해마다 6월 2일, 태백중학교 학도병 전우회와 유가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국을 위해 산화한 학도병들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지난 2일 기념행사에 참석한 이영도(81) ‘화백회’ 회장은 “돌아가신 18명의 태백중학교 학도병 중에서 시신은 두 사람밖에 못 찾았다. 지금도 이름 모를 고지와 계곡에 묻혀 있을 그분들을 생각하면 너무 안타깝다”라면서 “다시는 이 땅에 이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군이 굳건하게 지켜줄 것”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