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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전쟁영웅 김옥상 육군일병-독립운동가 문석봉 선정

 국가보훈처는 11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김옥상 육군일병을, 11월의 독립운동가로는 문석봉을 선정했다.


◇김옥상 일병, 단신으로 적 1개소대와 육박전

중공군이 한국에 침입해 온정리 운산에서 승리한 후 청천강 부근까지 침공했을 당시 국군 7사단이 비호산에서 중공 38군을 격퇴, 기세를 꺾어 놓은 방어전투가 이른바 개천 비호산 전투다.


이 전투에서 7사단은 미 1군단 포병의 지원 아래 3일간 격전을 벌여 중공군 2개 사단을 물리쳤다.


육군 7사단 5연대 소속이었던 김옥상은 1950년 11월 평안남도 개천 비호산 전투에 참전했다. 당시 김옥상은 적의 전초기지에 접근해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1개 소대병력의 적과 단신으로 결사적인 육박전을 전개해 다수의 적을 사살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이에 정부는 김옥상에게 1954년 6월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문석봉 독립운동가, 을미의병의 초석

1851년 경북 현풍군(현 달성군 현풍면)에서 출생한 문석봉은 어려서부터 무인의 자질이 다분했다. 그는 1893년 5월 별시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경복궁 5위장에 임명됐고, 그해 12월 진잠 현감에 제수됐다.


문석봉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소식을 듣고 국모의 복수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는 공주 유성 지역의 유림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당시 문석봉은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회덕현을 급습해 무기를 탈취하고 공주를 향해 진격했지만 관군의 공격에 패산했다. 비록 문석봉의 의병은 패산했지만 당시 사건은 을미의병의 초석이 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패산 후 그는 경상도 고령에서 재봉기를 준비했으나 고령현감의 고발로 체포돼 대구부에 수감됐다. 이후 탈옥을 감행한 문석봉은 서울에서 정계 원로들과 접촉하고 원주로 이동해 각도 의병장들에게 재봉기를 준비하자는 내용의 통문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옥고 등으로 몸이 쇠약해진 문석봉은 1896년 병을 얻게 되고 11월 19일 46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문석봉의 공로를 기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