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능비(廣開土太王陵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나오는 고모루성이 포천의 고모리 산성이라는 주장이 나와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고모루성의 위치와 관련 충북 음성 고산성, 충남 덕산, 포천 고모리 산성 등 3개의 학설이 있었다.
하지만 지난 16일 ‘수목원가는길2011’ 조직위원회(공동대표 김광우, 이제승, 장미환)가 주최한 ‘고모루성의 역사를 밝히는 학술세미나’에서 서병국 대진대 사학과 명예교수(발행사, 고구려사)는 ‘고모루성의 위치 고찰’이라는 논문과 이근영 대진대 국문학과 교수의 ‘고모루성과 고모리의 지명에 대한 언어학적 관련성’이란 발표를 통해 ‘고모루성이 포천의 고모리 산성’이라는 새로운 논거를 제시했다.
서 교수는 “문헌조사, 현지답사, 고고학적ㆍ언어학적 접근 등 종합적으로 살펴볼때고모루성은 고모리 산성일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말했다.
포천 고모리 산성이 고모루성이란 근거는 우선 능비에 나와 있는 백제58성과 700리에 대한 사서의 기록이라고 말했다.
서 교수는 “삼국사기는 호태왕(광개토태왕) 시기 백제와의 소규모 전쟁까지 다 수록했는데 58개성과 700개의 촌락을 뺏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한 해 동안에 점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전제했다.
또 “삼국사기 진사왕(辰斯王) 8년(392) 10월조를 보면 700개의 촌락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기사가 있다. 즉 진사왕은 고구려왕 담덕(談德, 호태왕의 이름)이 용병에 능함을 알고 싸우려하지 않아 북쪽에 있는 백제의 부락이 거의 고구려 군에게 함몰됐다는 내용이다. 이 기사는 고모루성에 대한 3가지 설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포천 고모리 산성설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그는 “포천은 마한의 동북 모퉁이 땅이었다가 백제의 건국으로 백제의 영토로 편입됐다. 그래서 포천에는 ‘모루’라는 지명이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많다. 모루라는 지명이 유독 많이 나타나는 지역이 백제의 건국 초기 포천 등 동북 변경 일대의 성들은 루(婁)자로 많이 표현되고 있다.
또한 백제의 왕 중에는 다루왕(多婁王)ㆍ기루왕(己婁王)ㆍ개루왕(蓋婁王) 등 루자로 표현된 왕도 많다. 이는 루자의 사용이 백제 사회에서 보편화됐음을 뜻한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말갈의 침입을 막는다는 조건으로 도읍지로부터 북쪽으로 100리의 땅을 마한왕으로부터 받았다. 때문에 이 땅은 백제시대에도 모퉁이로 통용돼 능비에서 보듯 모루(牟婁)ㆍ고모루(古牟婁)ㆍ구모루(臼模婁)ㆍ각모루(各牟婁) 등 모루(로)라고 표현된 성들이 많았왔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고모루성의 ‘모루’는 이 지역의 지명에 많이 나타나는 ‘모루’라는 지명과 동일하므로 포천의 고모리 산성이 고모루성이라는 것.
이근영교수는 “‘고모루’와 ‘고모리’의 언어학적인 연관성은 뚜렷하다. 그는 ‘고모리’를 ‘고모+모리‘로 분석했다. 우선, ‘고모’(姑母)를 ‘(한+뫼>한미>)할미’의 한자어 표기로 보아 고모(姑母)와 같은 의미의 한자인 노고(老姑)의 유래로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모’를 ‘ >곰 >고모’의 변화로 이해하는 것이 곰내(熊津), 고모재(古毛峴)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 지명으로 사용하고 있는 많은 지명들의 어원을 알 수 있게 가장 언어학적으로 타당한 해석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으로 ‘-모루’, ‘-모리’, ‘-머리’ 등은 고대 국어에서 같은 어원에서 출발했다며 어원을 ‘’에 두고 있는 이것은 ‘꼭대기, 위’라는 의미를 갖는다(> 말 > 몰 > 모리, 모루 >모이>뫼(山))고 밝혔다.
이에따라 고모리의 ‘모리’와 고모루의 ‘모루’는 언어학적인 연관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곰+모루>고모+모루>고모루>고모리’의 변화로 보고, ‘고모+모루’에서 중복되는 ‘모’가 탈락해 ‘고모루>고모리’가 되었다고 이교수는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