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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

1920년 3월 이범석(李範奭)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의 부름을 받고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大長)으로 부임하였다. 1923년 10월 5일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청산리(靑山里)에 도착하였다.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이 청산리 주위를 포위하여 오자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은 임시 전투조직을 개편하고 총사령관 김좌진, 군정서 참모장 나중소(羅仲昭), 사령관 부관 박영희(朴英熙) 등으로 개편 편성되었으며 이범석은 북로군정서 연성대장(硏成隊長) 겸 중대장이 되어 보병부대 1개 대대를 백운평(白雲平) 숲속에 매복시켰다.

소총, 중기관총, 수류탄 80만발의 탄환을 집결한 뒤 10월 20일 새벽 그는 우진 이민화(李敏華), 좌진 한근량(韓根凉) 중우 진의 김동(金動), 중좌진의 이교성(李驕成)에게 각각 2백발의 탄환을 직접 분배하였다. 10월 20일 9시경부터 청산리 백운평에서 일군과 교전이 시작되어 날이 저물도록 격전을 전개하고 일본군의 선봉부대를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다. 일본군 주력부대 5만이 골짜기에 다다랐을 때, 집중 사격을 가했다. 1차 선발대와 2차 선발대가 전멸하고 3차 선발대가 나타났다가 우왕좌왕 흩어질 때 이범석은 마상에서 독전 연설을 했다.

10월 21일부터 10월 23일 화룡현 내 천수동(泉水洞), 어랑촌(漁郞村), 만록구(萬鹿溝) 등으로 부대를 이동하면서 일본군을 습격, 독립군 전사자는 20여명이었으나 일본군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는 전과를 올렸다.청산리에서 전과를 올린 뒤 병력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이주, 새벽 2시에 천수동 골짜기에서 19사단을 공격하고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구출했다. 마록구(馬麓溝)에서는 2천 명의 군사로 2만 명의 일본군을 상대, 한인 교포들이 탄환과 물자를 수송하였고 90명의 독립군 전사자를 내고 2만 명의 일본군을 섬멸했다.

1933년 5~6월경 중 이범석은 이청천과 함께 100여 명의 장정들을 이끌고 중국 본토로 건너왔다. 1933년 중국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국 독립군 양성을 위한 한인특별반이 편성되자 한국인 특별반 장교대장에 선임되었다.1933년 후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소재지에 도착, 김구 세력에 합류하였다. 1934년 낙양군관학교 교육대장이 되었다.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결성되자 김구·이청천과 함께 광복군에 창군에 참여하여, 한국 광복군 육군소장에 임명되었고 1941년 광복군 중장에 임명되고 광복군사령부 참모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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