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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美 참전노병 에드워드 프라이의 애타는 사연 “누가 이 여인들을 아시나요”

 

군산서 함께 근무했던 기억 생생 당시 사서·전화 교환원으로 일해 “죽기 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어”

                                                           미군 참전 노병 에드워드 프라이 씨가 찾고 있는 한국 여인들.

 

“Where are they today?”(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6·25전쟁의 한복판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미군 참전 노병이 함께 근무했던 한국인 ‘여인’들을 애타게 찾고 있다.

1952년 10월부터 54년 9월까지 미 육군 14수송대대 하사로 한국 군산에서 근무했던 에드워드 프라이(Edward Frye·79·당시 20세·왼쪽 사진) 씨가 한국을 찾았다.

지난 20일 종전 이후 처음으로 59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은 프라이 씨 손에는 전쟁통에 찍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해외 참전용사들이 함께 싸운 전우를 찾는 일은 있지만 민간인을 찾기는 그리 흔치 않다.

프라이 씨 부대는 미국에서 배를 통해 군산항으로 들어오는 탄약과 장비 군수품을 기차와 트럭으로 최전방 전선으로 신속히 나르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전쟁 속에서도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고 미군 부대에서 함께 근무했던 한국인 젊은 여인들이 지금도 기억 속에 사진처럼 선명하기만 하다.

프라이 씨는 “부대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했던 사진 속 맨 왼쪽 여인은 별명이 ‘스토니(Stoney)’였다”면서 “가운데와 오른쪽 여인 둘은 미스 김이라고 불렀으며 전화 교환원이었다”고 생생히 기억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부대 교회에서 일요일 예배 때마다 찬송가를 불렀던 이들은 프라이 씨가 54년 한국을 떠나면서 연락이 끊겼다.

프라이 씨는 “6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이 젊은 여인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로 만나 보고 싶다”면서 “죽기 전에 꼭 이들의 연락처를 알고 싶다”고 말했다.

프라이 씨는 인간의 생명과 재산을 참혹히 앗아가는 전쟁 속의 인연조차도 60년 가까이 한국에 대한 소중한 기억으로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

프라이 씨는 “공산주의와 맞서 싸웠던 수많은 참전용사들의 피와 땀, 헌신과 희생이 지금의 한국을 지킬 수 있었다”면서 “전쟁의 잿더미에서 그 많은 어려움을 딛고 발전한 한국을 보면서 큰 감명을 받는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프라이 씨는 “아직도 분단된 남과 북이 하루빨리 통일이 됐으면 한다”면서 “60년 전 피로 맺은 한미동맹이 더욱 강력해 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사진 속 주인공이나 근황을 아시는 분은 국방일보 기획사회팀(02-2079-3721)이나 프라이 씨 전자우편 egfrye32@yahoo.com 으로 연락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