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팔굽혀펴기 60회와 스트레칭으로 아침을 연다는 김두만(85·제11대 공군참모총장·사진) 장군은 우리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을 달성했으며, 6·25전쟁 후반부터는 후진 양성에 주력해 오늘날 대한민국 공군의 초석을 닦았다. 공군회관에서 만난 김 장군은 61년 전 6월 25일의 체험이 뇌리에 각인된 듯, 정확하고 생생하게 기억을 풀어나갔다. 개전 첫날부터 여의도 공군기지를 포기하고 수원으로 철수한 27일까지의 3일간은 그에게 있어서, 그리고 당시의 대한민국 공군에 있어서 큰 시련의 때였다고 회고했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대한민국 공군의 몇 안 되는 조종사 중 한 사람이었던 김두만 중위(당시 계급)는 휴일을 맞아 동료와 함께 서울 시내로 외출을 나와 있었다. 전차(電車)를 타고 한강대교 북단을 지날 무렵 귀에 익지 않은 항공기의 소음과 함께 김포 방면으로 날아가는 전투기 2대가 눈에 들어왔다. 적기였다. 곧이어 전쟁이 발발했음을 알리는 사이렌이 시내를 뒤덮었다.
속수무책의 개전 첫날
1949년 육군에서 독립한 대한민국 공군이 개전 당시 보유하고 있었던 항공기는 20대에도 못 미치는 숫자의 L-4·L-5 연락기와 1950년 3월께 캐나다에서 구매한 T-6 훈련기 10대가 전부였다.
“우리 공군도 전투기를 도입하기에 앞서 훈련기가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방예산이 충분하지 않아서 국민들의 성금을 모금할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몇 달 만에 35만 달러라는 큰돈이 모였고 T-6 훈련기를 살 수 있었지요.”
신형 훈련기가 도입되고 선배 조종사 10명이 3개월간의 훈련을 받은 후, 김 중위에게도 기회가 돌아오려는 찰나 전쟁이 터졌다. 군인들은 전부 부대로 돌아가라는 헌병 지프의 방송을 듣고 황급히 귀대한 김 중위의 눈앞에 펼쳐진 여의도 공군기지의 상황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오전 10시쯤 부대에 도착하자 적기의 공습이 시작됐어요. 활주로에는 폭격과 기총소사가 이어지고, 다른 조종사들과 함께 공습을 피해 도망 다니기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비행장 옆의 둑에 숨어 있었는데, 누군가 기관총을 한 정 구해 와서 적기에 사격을 가해 봤지만 제대로 맞지도 않았죠. 그렇게 25일이 정신없이 지나갔어요,”
하지만 행운도 있었다. 비행기지가 하루 종일 공습을 당했음에도 항공기의 상당수가 파괴되지 않았던 것. 특히 당시의 유일한 공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T-6 훈련기는 10대 가운데 1대만 파손되고 9대가 건재했다.
신형 훈련기 10대 중 9대 건재
“북한 조종사들의 실력이 형편없었던 덕분에 살았어요. 또 T-6 훈련기의 경우에는 특이한 관리방법 때문에 살릴 수 있었지요. 전쟁 전에는 우리 군 내부에도 적과 내통하는 무리가 있었어요. 공군에서도 연락기를 몰고 월북한 사례가 있었기에 최신예 훈련기를 보호하기 위한 특별한 지침이 있었습니다.”
국민의 정성을 모아 샀던 T-6 훈련기를 보호하기 위해 공군에서는 비행을 마친 T-6들을 한 격납고에 모아 놓고 경비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몰래 조종해서 월북할 수 없도록 기름을 모두 빼내고 주유구를 봉인해 놓는 조치까지 해 놨다고 한다.
“공습이 끝난 뒤에 격납고를 확인해 보니 T-6 한 대가 기총소사에 피탄을 당해 있었습니다. 만약에 항공기들에 기름이 들어 있었다면 연쇄폭발을 일으켰겠지만, 기름을 모두 빼놓는 조치 덕분에 직격당한 한 대 외에는 모두 멀쩡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영화 ‘진주만’에서처럼 T-6 훈련기로 곧바로 이륙해 적기와 맞서 싸우는 용맹한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T-6 훈련기는 원래 기관총 2정을 보유하고 있어 사격훈련까지 할 수 있는 훈련기였지만, 항공기와 기관총이 캐나다에서 따로 배송된 것이 문제였어요. 개전 당일 우리가 보유한 T-6에는 기관총이 장착돼 있지 않았습니다. T-6용 기관총이 부산항에 배송된 것은 한창 후퇴하고 있던 8월께였어요.”
처음 타 본 훈련기로 첫 출격
개전 이튿날 미군 사령부에서 전투기를 제공해 주겠으니 조종사를 보내 달라는 연락을 받고 T-6 훈련기로 훈련을 마친 조종사 10명이 미군 수송기를 타고 일본의 규슈로 넘어갔다. 김 중위와 동료 조종사들은 L-5 연락기를 몰고 정찰비행을 나섰지만, 26일에도 김포와 여의도 비행장에 대한 공습이 계속됐고, 새까맣게 밀려오는 적군의 행렬만을 바라보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적은 밀려오고 공격은 당하는데, 우리 공군이 보유한 반격 수단이 없었어요. 한 가지 위안은 미 공군의 전투기들이 날아와 한강 상공에서 북한 전투기들을 요격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날 저녁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김 중위에게 T-6 훈련기를 조종해 보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 왔다. 원래 교육 일정대로라면 T-6 훈련기를 이용한 비행훈련을 코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론적인 조종 절차에 대한 예습을 마쳐 뒀던 김 중위가 자신 있게 “명령을 하시면 타겠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럼 내일부터 타!!”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더 빠르고 성능 좋은 항공기를 꼭 타 보고 싶었어요. T-6 훈련기가 도입된 이후 줄곧 조종해 보고 싶었는데, 이제 명령도 떨어졌으니 기쁜 마음으로 훈련기에 올랐답니다.”
27일 아침에 기상한 김 중위는 T-6 훈련기의 정확한 취급과 조종 장치 확인을 위해 정비사를 후방 좌석에 태우고 날아올랐다.
한 시간 정도 공중에서 비행연습을 마친 뒤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첫 번째 출격 명령이었다.
여의도 기지의 작전지휘를 맡고 있던 박범집 대령(당시 공군 참모부장)은 김 중위에게 적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문산의 철교를 폭파하라는 임무를 줬다. 김 중위가 타고 출격할 T-6 훈련기에는 26일 밤새 정비사들이 장착한 10개의 폭탄 투하 장치에 국산 소형 폭탄들이 달려 있었다. 영등포의 육군 조병창에서 생산한 15㎏짜리 국산 폭탄 270여 개를 모두 공군이 갖고 와 실전에 투입하게 된 것이다.
첫 출격과 구사일생의 첫 실패
첫 연습비행 직후 실전 출격을 하게 된 김 중위는 다시 정비사를 후방 좌석에 태우고 문산을 향했다.
“첫 출격이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았어요. 구름이 낮게 깔려서 그 밑으로 비행하니 고도가 1500피트(약 450m) 이하였습니다. 주의해서 비행했지만 더 낮은 고도에 있던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답니다. 구름 안에서 항공기가 자세를 잃었는지 실속했다는 경고음이 울리면서 몸이 돌아가는 느낌이 왔어요.”
실속한 김 중위의 T-6 훈련기는 회전하며 구름을 뚫고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어느새 어떻게 폭탄 투하 버튼이 눌렸는지 모르겠지만, 10발의 폭탄이 투하 장치에서 분리돼 비행기 옆에서 함께 돌며 떨어지고 있었다. 폭탄이 언제 기체에 부딪쳐 폭발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김 중위가 반사적인 조종술로 어렵사리 기체를 안정시켰을 때 고도계는 200피트(약 60m)를 가리키고 있었고, 지상에 격돌한 폭탄들이 동시에 폭발하며 발생한 파편들이 동체 밑을 두드렸다.
“땅이 막 솟아오르는 가운데 조종간을 당겨서 기체를 수평으로 만들었어요. 직후에 폭탄이 터지면서 기체가 요동을 치는데, 여름이라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열어 놓은 캐노피 사이로 흙과 자갈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기지로 귀환한 뒤 어안이 벙벙해 있는 후방석의 정비사에게 어떻게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설명하자, 독실한 신자였던 정비사가 신의 도움으로 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주 주일에 부대교회 주보에는 동승했던 정비사가 김 중위와 함께 목숨을 건진 사건을 간증한 내용이 실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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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회 출격을 달성하고 귀환한 김두만 소령에게 동료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고 있다. 1950년 10월부터 F-51 전투기로 전투출격을 시작한 김 소령은 1952년 1월 11일 한국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수립했다. |
적 진격 조금이라도 늦추려 용전분투
김 중위의 첫 출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를 비롯한 조종사들은 27일 하루 동안에만 수차례의 출격을 거듭하며 적의 진격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용전분투했다. 김 중위를 비롯한 T-6기 조종사들은 제대로 된 급강하 폭격이 가능했지만, L-4·L-5 연락기 조종사들은 15㎏ 폭탄을 양 손에 하나씩 거머쥔 정비사들과 함께 이륙해 손으로 적군 행렬에 직접 폭탄을 떨어뜨리는 위험천만한 공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절망적인 상황이었어요. 그때는 유엔군이 우리를 도우러 온다는 사실도 알 수 없었고, 미군이 전면적으로 도와주리라곤 생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27일 오후 5시쯤에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까지 밀려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날의 마지막 출격을 했습니다. 트럭 무리에 폭탄을 뿌려줬는데, 전과 확인을 할 여유는 없었지요.”
27일 저녁 7시에 후퇴가 결정되고 여의도 기지 인원들은 수원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조병창에서 가져 온 폭탄도 이미 바닥 나고 2발밖에 남지 않은 상황. 김 중위는 아무도 챙겨가려 하지 않는 마지막 폭탄 2발을 자신의 T-6기에 장착했다.
“L-4나 L-5 연락기는 캔버스로 만들어져 있어서 적 전차에 격돌해 봐야 흠집도 낼 수 없었지만, 금속으로 제작된 T-6기는 잘 들이받으면 전차 한 대 정도는 파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끝까지 싸우다 마지막에는 적 전차와 함께 자폭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었지요. 폭탄 두 발을 챙긴 것도 자폭할 때 효과가 클 것 같아서였답니다.”
전투는 없고 정찰만 있던 나날들
27일 수원으로 옮긴 T-6기 부대는 28일에 다시 대전 기지까지 물러났다. 무기가 다 떨어진 우리 공군기들은 정찰임무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29일 유엔군의 참전 소식이 들리면서 이를 알리기 위한 삐라를 서울에 살포하라는 임무가 김 중위에게 주어졌다.
삐라를 가득 실은 T-6기가 서울 상공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쯤. 관악산 상공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는 쥐 죽은 듯이 고요했고, 차도에는 북한군의 트럭들만이 가끔씩 돌아다니는 모습이 목격됐다.
“지금의 조선일보 건물이 있는 자리가 예전 국회의사당 자리였는데, 그 꼭대기에 붉은 별이 떡 달려 있는 모습이 기분 나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폭탄이 없으니 삐라라도 잔뜩 뿌려 주고 왔죠.”
삐라를 뿌리고 비행기지로 돌아오는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우군으로부터 오인 사격을 당하기도 하고, 활주로 유도등조차 제대로 유지할 수 없었던 비행장에 야간 착륙을 하기 위해 지상 요원들이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횃불 등을 이용해 활주로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했다.
“T-6기를 조종해 구름을 뚫고 내려가자 지상으로부터 총알이 막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공군기는 거의 없고, 적기가 하늘을 뒤덮고 있던 때였으니 난데없는 비행기의 출현에 육군이 즉각적으로 대응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본격적으로 우리 공군에 F-51 무스탕 전투기가 보급되기까지 한동안 정찰의 나날이 이어졌다. 김 중위도 정찰비행 중 구물구물 내려오는 적 전차 행렬을 목도하며, 아쉬움에 주먹만 떨리는 시간을 보냈다.
“F-51 전투기와 로켓탄만 있으면 저기 몰려오는 적들을 모조리 박살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 갖고 돌아설 수밖에 없던 시간이었습니다.”
대망의 F-51 전투기 탑승
F-51 전투기 수령을 위해 일본으로 향했던 조종사들이 7월 2일 돌아왔다. 그리고 10월 1일에는 김 중위도 대망의 F-51 전투기 기종전환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받은 다음날부터 김 중위는 미군 조종사들과 함께 북한의 신안주 방면으로 출격을 시작했다.
“F-51 전투기를 타 보니 이게 진짜 비행기구나 싶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야생마 같은 파워와 기동성, 강력한 무장. 지금까지 타 본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F-51로 첫 출격을 해 기관총 1800발과 로켓을 적에게 퍼붓고 돌아오니 그간의 묵은 한이 싹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F-51 전투기를 체험했던 김 중위는 대위로 진급한 후 1950년 12월 19일 선발대와 함께 제주 기지로 이동해 본격적인 F-51 전투기 조종사 양성에 들어갔다.
“훈련이 안 된 상태에서의 출격은 조종사들의 희생만 늘린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공군은 미 공군 고문단과 상의 끝에 제주도 기지를 F-51 전투기 사격훈련까지 가능한 곳으로 만들어 정식적인 조종사 양성을 시작했습니다.”
제주도 기지에서 훈련받은 조종사들은 1951년 3월부터 여의도 기지에 배치돼 미 공군 조종사들과 함께 서부전선으로 출격을 시작했다. 김 대위도 같은 해 4월 말 여의도 기지로 전진해 다양한 공격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한국 공군은 미 공군과의 합동 출격을 종료하고 단독으로 출격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8월 1일 공군비행단을 제1전투비행단으로 증편했다.
얼떨결에 다가온 100회 출격
-51 전투기를 몰고 첫 출격한 이래 매일 1~2회가량 출격하며 전과를 올리던 김 대위는 1951년 12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진급 후 한 달이 조금 넘은 1952년 1월 11일, 금강산 일대의 북한군 보급로를 공습하는 임무를 수행한 후 기지로 돌아온 김 소령은 조종석에서 내려오자마자 전대장의 열렬한 악수를 받았다. 이것이 김두만 소령의, 그리고 우리 공군 최초의 100회 출격 기록 달성의 순간이었다.
“100회 출격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돌아와 보니 100회 출격이었습니다. 나중에는 100회 출격한 조종사들에게는 지역 여고생이 와서 꽃다발도 안겨 주고 했었는데, 그때는 처음이라 그랬는지 악수와 정비사들의 헹가래가 전부였었죠.”
100회 출격을 달성함에 따라 공군본부에서는 베테랑 조종사인 김 소령이 풍부한 비행 경험으로 후진을 양성해 주길 바라고 전속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김 소령은 우리 공군 전사에 길이 남아 있는 승호리 철교 폭파작전에 참가한 뒤 자리를 옮기겠다고 했다. 100회 출격 달성 이튿날 편대를 이끌고 승호리로 날아가 주변의 대공포 진지를 제압하고 500파운드 폭탄 10발을 투하했으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이어서 13일 두 번째 출격을 했지만 기상이 좋지 않아 승호리로 향할 수 없었다.
공군본부는 김 소령이 충분히 임무를 수행했다고 보고 속히 조종사 양성으로 자리를 옮기길 종용했다. 그가 임무에서 손을 뗀 후 15일 옥만호 대위(당시 계급·작고)가 이끄는 편대에 의해 승호리 철교는 성공적으로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끝까지 임무를 함께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지만, 후배들이 임무를 성공시켜 줘 자랑스럽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6·25전쟁에 대한 기억을 풀어 놓은 김 장군은 앞으로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6·25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군 내부에서는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는 큰소리가 나돌았었습니다. 정말 적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모르니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적과 나를 잘 파악하고 철저한 대비를 하는 것만이 전쟁을 억제하고, 또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길입니다.”
또 그는 실전과 같은 훈련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6·25전쟁 중에는 조종사들을 충분히 훈련시킬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조종사들이 부족한 훈련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출격했지만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제는 실전과 같은 훈련을 통해 싸우면 이기는 군대를 만들어 6·25전쟁 때와 같은 희생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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