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내가 겪은 6·25-전제현 소대장의 용문산전투

“2연대 전면방어<全面防禦>로 적 군단급 공격 막아”

 

 

6ㆍ25전쟁 61주년을 맞아 장병들과 학도병ㆍ민간인들이 겪었던 전쟁의 다양한 면모를 인터뷰 혹은 수기 형식으로 소개한다. 직접 온몸으로 6ㆍ25를 체험했던 이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통해 국군의 활약상과 전쟁의 비극을 되짚어 본다.

장군이 태극기·유엔기·성조기가 나란히 등장한 사진을 가리키며 6ㆍ25전쟁 당시 미군의 도움이 컸음
을 설명하고 있다.

■ 전제현 장군 프로필
 ▲ 1929년 평북 정주 출생, 정주 중학교 교사
 ▲ 1950년 7월 육군 이등병 입대
 ▲ 1950년 10월 육군종합학교 3기로 장교 임관
 ▲ 1951년 5월 용문산전투 당시 6사단 2연대 1대대 예하 소대장
 ▲ 6군단 포병사령관, 11사단장, 포병학교 교장, 3사관학교 교장 역임
 ▲ 1983년 소장으로 예편
 ▲ 1984~99년 오산고등학교 교장
 ▲ 현 사단법인 자유수호 국민운동 상임의장
 ▲ 충무훈장, 보국천수장, 화랑훈장, 미국 동성훈장 수훈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1년 5월 아군 1개 사단이 적 군단급 부대의 공격을 막아낸 용문산전투. 그 기적의 역사를 되짚어보기 위해 만난 사람은 전제현(육군종합학교3기ㆍ예비역 소장) 장군이다. 당시 소위 계급으로 6사단 2연대 1대대 예하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전 장군은 현재 용문산전투 전우회장을 맡고 있다.

전 장군을 만나자마자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용문산전투가 아니라 사창리전투였다. 6사단의 용문산의 대승은 사창리의 고전(苦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춘천전투의 승리가 기(起)라면, 압록강물을 담은 수통은 승(承)이고, 사창리의 아픈 기억이 전(轉)이며, 용문산전투의 대승이 결(結)이기 때문이다.

 ◆ 사창리의 아픈 기억

‘사창리에서 왜 고전한 것 같냐’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지자 전 장군은 당시에는 소대장이어서 전체 전황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전제한 다음, 당시 경험과 전사 기록을 놓고 판단해 보면 중공군의 유인전술에 말려 들어 간 것이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당시 우리 2연대 1대대가 제일 앞서 갔습니다. 보통 행군대열 앞에는 사단 수색중대가 대공포판을 끌고 다녔죠. 우리 앞에 대공포판이 보여서 사단 수색중대라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없이 따라갔는데 어느 순간 그 병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류산 북쪽 사창리 안쪽으로 깊은 계곡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에 중공군이 우글우글했습니다. 유인돼서 포위당한거죠.”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과연 무시무시했다. 당시 1대대의 김동완 소위는 박격포의 명사수였다. 김 소위가 지휘한 아군 81㎜ 박격포들이 중공군을 정확하게 강타했다. 그럼에도 적의 공격 기세는 약해지지 않았다.

“말도 마세요. 아군 박격포에 맞아 마구 날아가는 중공군 시체가 보이는 데도 그 자리로 계속 중공군이 밀고 들어옵니다. 사람이 죽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나옵니다. 그게 인해전술입니다.” 

 ◆ 오인 포격과 차량 손실

하지만 당시 1대대가 철수한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전 장군의 설명이다. 당시 아군의 동쪽 방향에 있던 유엔군이 아군 진지로 오인사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아마 위력으로 보건데 155㎜급 곡사포까지 쏜 것 같습니다. 우리 위치를 오인한 것 같아요. 우리 진지는 물론이고 후방 2㎞ 지점까지 유엔군이 쏜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그 당시 상황만 보자면 후퇴한 것이 아니라 포탄을 맞지 않기 위해 피한거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미군 전차가 좁은 도로에서 고장으로 멈춰 도로가 막힌 것이 치명타였다.

“좁은 계곡 사이로 춘천으로 가는 도로가 이어지는데 차 두 대가 교행할 수 없을 만큼 좁았습니다. 그 좁은 길에 미군 전차가 멈춰서 길을 막았죠. 미군들이 도와달라고 해 소나무를 통째로 베어다가 수십 명이 달려들어 지렛대로 전차를 옮기려 했지만 그 큰 전차가 그걸로 움직입니까. 결국 그 뒤에 대기하고 있는 아군 차량은 모조리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 공군기들이 와서 차량을 폭파시켰죠. 참담했습니다.” 

 ◆ 사단장의 독전연설

그렇게 후퇴해서 용문산 남쪽으로 내려오자 장도영 6사단장이 2연대 집결지로 나타나 연설을 시작했다. 당시 부대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꾼 것으로 전사상 유명한 장 장군의 독전(督戰) 연설이었다.

“4월 27일께일 겁니다. 사단장님이 오셔서 연설을 했습니다. 너희들이 사창리에서 후퇴했기 때문에 그 많은 차량과 포, 장비들을 적중에 두고 와서 할 수 없이 미군 비행기로 다 파괴했다. 전 유엔군이 수십㎞나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 너희들 때문이다. 앞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서 이 오명을 씻어야 한다. 이런 말씀을 하셨죠.”

연설의 마지막 순간 사단장은 사창리전투 패전의 책임을 물어 2연대장과 1대대장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두 사람을 바로 헌병차로 압송하도록 조치했다.

1대대 장교들만 따로 마른 논바닥에 모아놓고는 더욱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원래 대대에 장교 정원은 35명 정도였지만 당시 장교 생존자는 10여 명 수준. 그중 한 명이었던 전 장군은 당시 장 사단장의 평안도 사투리의 질책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야, 야 이 깍대기(겁데기)만 사람 깍대기 뒤집어 쓴 XXX들 다 나가 죽으라우. 너희들 때문에 사단이 망하구 유엔군이 후퇴했어. 뒤를 돌아다 보라우. 저 도요타 추럭(트럭) 두 대와 거기 적재된 화기, 탄약, 식량, 피복이 현재 우리 사단이 가진 전 재산이야. 이제부터 저 차에 있는 것을 머이든지 개지구 싶은대로 다 개지구 가라우. 다시는 재보충이 없어. 있는 대로 개지구 가서 죽으라우.”

당시 장 사단장은 각 부대를 돌며 여러 차례 조금씩 다른 내용의 독전연설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연대 1대대에서는 꾸중에 가까운 독전연설을 한 셈이다.    

 ◆ 신분증을 불태운 이유

장 사단장이 돌아간 뒤 1대대 장병들은 묵묵히 트럭에서 보급물자를 내렸다. 사창리에서 후퇴할 때 차량을 모두 잃었기 때문에 사단장 말대로 사단이 가진 보급차량이 없었다. 1대대 장병들은 언제 다시 보급받을지 불확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물자를 챙겼다.

“천으로 된 전대에 M1 소총 8발 클립 12개 조를 넣으면 96발이 들어갑니다. 이걸 ‘X’자 모양으로 둘러 개인별로 실탄 192발을 우선 챙겼죠. 그리고는 반합과 배낭에 쌀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걸로도 모자라 배낭에 챙겨 둔 신품 하얀색 면양말에 쌀을 넣고 목에 걸었죠. 그러고 일어나니 휘청하더군요. 그 꼴로 다시 용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행군했습니다.”

용문산전투는 …
1951년 5월 18일부터 20일까지 육군6사단이 용문산 북쪽에서 군단급 부대인 중공군 63군의 공격을 막아낸 전투. 경계부대인 6사단 2연대가 전면방어 개념으로 중공군 군단급 공격을 막아낸 후 6사단 7연대와 19연대가 반격으로 전환해 63군을 격퇴한 것으로 유명하다.

용문산에서의 승리 자체도 의미가 크지만 후퇴하는 중공군에게 치명타를 입혔던 춘천ㆍ화천 추격전의 발판이 된 전투로도 의미가 크다.

또한 중공군 특유의 공격 스타일에 어려움을 겪던 우리 군이 중공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음을 입증해 국군의 명예와 자신감을 회복한 점에서도 전사상 상징성이 큰 전투로 평가받는다.

전제현 장군의 무공훈장증.
6·25전쟁 당시의 전제현(가운데) 장군 모습.

용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행군하던 6사단 2연대 1대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휴식에 들어갔다. 대대장 대리를 맡고 있던 진명섭 대위가 장교들만 따로 모아놓고 말을 꺼냈다.

“자, 우리들 이제는 다 죽게 됐으니, 죽을 바엔 깨끗이 죽읍시다. 그렇다고 이 마당에 우리가 세수를 하겠소, 목욕을 하겠소. 우리가 죽어도 호주머니 안에 담배가루 하나 남지 않도록 몸 정리는 하고 죽읍시다.”

말을 마친 대대장은 주머니에서 신분증, 수첩, 돈을 꺼내 찢은 다음 땅바닥에 던져 놓고 불을 붙였다. 10여 명의 대대 장교도 대대장을 따라 주머니 속을 뒤져 신분증과 돈을 꺼내 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모두들 목숨을 버리겠다는 각오였다. 그 순간 연이은 격전으로 면도조차 하지 못한 데다 햇빛에 새까맣게 탄 장교들의 덥수룩한 얼굴 위로 소리 없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는 것이 전 장군의 기억이다.  

 ◆ 용문산 승전의 비결  

용문산전투는 경계부대 책임을 맡은 2연대가 사주방어(四周防禦ㆍ현재 용어로 전면방어) 방식으로 적 군단급 공격에 맞서 방어에 성공한 전투다. 사실상 1개 연대로 적 3개 사단의 공격에 맞서 방어에 성공했다는 것도 특이하지만 주저항선이 아닌 경계부대 진지에서 승패가 갈렸다는 점에서 통상적 방어전과는 거리가 멀다.

“원래 당시 아군의 방어개념은 선(線)으로 죽 연결되는 선방어 개념입니다. 그런 주저항선 앞에 2㎞ 지점에 전투전초(COP)를 내보내고, 4㎞ 지점 앞에는 일반전초(GOP)를 내보내는 거죠. GOP는 좀 싸우다가 빠지는 겁니다. 그리고는 뒤로 물러나 사단 예비대가 되는 거죠.”

전 장군은 당시 6사단의 방어개념과 통상적인 방어개념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주방어가 결정적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했다.

“당시는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선방어개념인데 선이 끊어져 돌파되면 포위당하는 거죠. 그런데 용문산전투 때는 사단장의 의도에 따라 전초부대에 해당하는 2연대 예하 3개 대대가 선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죠. 그 틈새로 중공군이 몰려 들어왔지만 전후좌우 모두 방어가 가능한 사주방어 진지를 편성한 덕에 중공군 군단급과 끝까지 싸운 겁니다. 특히 2연대 예하 대대 중 3대대가 진짜 잘 싸웠습니다. 워낙 잘 싸워서 중공군이 주력이라고 오인할 정도였죠.”

이 같은 용문산전투 당시 아군의 특이한 방어방식은 사전에 계획된 것일까, 아니면 전장 상황에 따라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일까. 이 점에 대해 전 장군은 “계획적이었을 것”이란 의견을 내놓았다. 그 근거는 장도영 사단장이 5월 14일 2연대 진지에 찾아와서 한 연설이다. 전 장군이 기억하는 14일자 장 사단장의 연설 내용은 이렇다.

“너희들이 용문산만 바라 보고 있다는데 남쪽의 용문산을 바라보지 마라. 북쪽을 봐라. 여기를 각 대대가 거점을 잘지켜 진전에서 격멸하고 피해를 주라. 그럼 차후 반격할 때 이곳이 교두보가 된다. 제발 끝까지 지켜다오.” 이 무렵 2연대는 용문산 북방에서 대대별로 사주방어 진지를 편성한 상태였다. 즉, 장사단장은 처음부터 2연대의 사주방어 진지를 통해 끝까지 저항할 생각이었고, 이를 발판으로 반격을 하겠다는 구상까지 한 상태였던 것이다. 

 ◆ 밤새 소리질렀던 정훈병

용문산전투 당시 2연대 3대대의 한 중대장이 정상적으로 지휘하기 힘든 상황에서 정훈병이 밤새 병사들을 독려해 방어전을 계속했다는 증언도 있다. 사실인지 물어보자 전 장군은 “사실”이라고 답했다.

“저는 1대대 소속이어서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 당시 중대에 정훈병이 2명씩 있었고 나름 역할이 컸습니다. 당시 병사들이 지금과 달라서 문맹자가 7할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배고프다는 소리만 하는 등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병사들이 많았죠. 그런 병사들에게 용기를 주고, 사기를 북돋는 것이 정훈병의 역할이었습니다.”

과연 그 정훈병은 무슨 소리로 자신의 중대원들을 격려한 것일까. 그에 대한 전 장군의 증언이 이어졌다. 

“3대대의 정훈병이 서기종 일병이라고 기억하는데 ‘중대장님이 여기 계신다’ ‘우리 부모님들이 부산으로 피난가는 꼴을 또 봐야겠냐’ 이 두 가지 이야기를 주로 한 것으로 압니다.” 이 같은 격려가 장병들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된 것일까. 전 장군은 주저 없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사실 공격보다 방어전 때 공포심이 훨씬 큽니다. 호 속에 들어가 있으면 좌우 병사들이 보이지 않죠. 마치 혼자만 남은 것 같고, 옆에서 소리가 나지 않으면 불안해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사람 심리죠. 그래서 지휘관이 여기 남아 있다는 걸 알려주는건 당시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데 결정적이었습니다.” 

 ◆ 실탄 대신 입으로 싸운 사연

사실 용문산전투 중 전 장군도 ‘입’으로 싸운 적이 있다고 했다. 용문산전투 1일차인 1951년 5월 18일 홍천강변의 장락산에서 격전을 치른 후 다음날인 19일 나산으로 이동해 중대장 대리 자격으로 두 번째 전투를 치를 때의 일이다.

“나산에서 싸울 때는 내가 책임지고 있는 중대의 정면에는 적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우리 중대는 실탄이 거의 떨어진 상태라 진짜 불안했습니다. 박격포탄은 다 써버렸고, 기관총탄도 아주 적게 갖고 있었습니다. M1 소총탄도 1인당 겨우 몇 십발, 말로 계속 부하들을 격려할 수밖에 없었죠. 중대장이 여기 있다고 고함치고 자리를 지켜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전쟁사에선 나산의 방어전에서 1대대가 고전했다는 정도로만 기록돼 있었지만 전 장군은 탄약 부족으로 고전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을 털어놓은 것이다.

“사실 이렇게 고함치면 적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아 위험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얼마 전에 다른 언론과 인터뷰할 때 실탄이 없어 입으로 싸웠다고 하니 이해 못하겠다고 하던데, 당시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죠. 달리 방법도 없었고 사기가 무엇보다 중요했으니까요.”  

 ◆ 노무자도 적 포로 잡아

용문산전투 이후 화천추격전까지 국군 6사단은 적 포로 수천 명을 잡는 대전과를 거뒀다. 전 장군에게도 포로를 직접 잡은 기억이 있는지 물어 봤다.

“직접 잡은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대에 식량을 전해주던 노무자가 포로를 잡아 온 적은 있었죠. 당시 민간인 노무자들이 지게를 지고 부대에 주먹밥을 보급해 줬는데, 어느 날 노무자가 지게를 중공군이 짊어지게 하고는 부대로 오더라고요. 뭐냐고 물으니 중공군이 민간인 노무자에게 항복했다는 겁니다.”

전 장군은 심지어 다리 밑에 숨어 있는 중공군 패잔병을 마을에 남아 있던 노인들이 붙잡아서 부대에 넘긴 사례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용문산전투 때 적들이 당황해서인지 당시 그런 웃지 못할 일들이 많았다는 것. 전 장군은 용문산전투 후 중공군이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 몇 가지를 들었다.

“화천 저수지(현 파로호) 동남방에 유촌리라고 있습니다. 산에 나무가 울창한 곳이죠. 어쩌다가 사냥꾼이 다니는 길이라 오솔길 흔적만 있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폭 20m 정도의 길로 바뀌었습니다. 중공군 대부대가 좁은 산길로 집단으로 도망가니 순식간에 길이 생긴 거죠.”

 대대 병력은 돼 보이는 중공군이 몰사한 장면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했다.

“화천발전소 바로 북쪽에 풍산리 절골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거기에 가 보니 중공군 병사와 말들의 시체 및 부서진 마차가 도로 수백m에 죽 널려 있었죠. 중공군이 제공권이 없다 보니 주로 밤에만 다녔는데 사정이 급하다 보니 대낮에 도망가다 미 전투기들의 공격을 받아 다 죽은 겁니다.”    

 ◆ 6·25의 교훈

전 장군에게 ‘6ㆍ25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뭐가 있겠느냐’고 물었다. 전역 후 오산고교 교장을 15년이나 지낸 교육계의 원로답게 전 장군은 차근차근 자신의 사례를 들며 이야기를 풀어갔다.

“나는 사실 북한의 남침으로 6ㆍ25전쟁이 나기 전만해도 내가 유니폼을 입는 사람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 장군은 입대 전 학교 교사였다) 그런데 30년 넘게 군인의 길을 걷고 장군으로 전역했죠. 개인의 꿈이나 희망, 계획 이런 것은 전쟁이 나면 무의미해집니다. 일상이 파괴되고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 전쟁입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이야기하던 전 장군은 바로 그때문이라도 우리 군 장병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을 이어 갔다.

“그런 점을 생각하면 전쟁이 일어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전쟁에 대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장병들이 임무를 잘 수행하고 전쟁에 잘 대비해야 전쟁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하고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전 장군은 북한 동포들의 고통을 잊지 말자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남겼다.

“북한의 불법남침으로 시작된 6ㆍ25전쟁 때 우리는 대한민국은 지켜냈지만 북한 동포는 결국 완전히 구해내지 못했습니다. 북한 지도부가 나쁜 것이지 일반 북한 동포들은 아무런 죄도 없는데 온갖 고생을 하면서 심지어 아사(餓死)하는 사람까지 부지기수입니다. 그런 2300만 북한 동포들의 고통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육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인터넷 소통모임

Army Suppor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