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눈에 보는 6·25전쟁
한 눈에 보는 6·25전쟁 |
1 북한의 기습 남침 · 서울 피탈 (1950. 6. 25 ~ 6. 28)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기습남침을 감행하여,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유엔은 6월 28일 북한의 불법남침을 응징하기 위한 군사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여 유엔군이 참전하였다.
북한 남침 증거 |
▶ 공개된 구소련 비밀문서 기록 - 스탈린 남침 승인(’50. 3. 30) ▶ 북한주재 소련대사가 본국에 보고(공격개시일 기록) ▶ 북한군 제2보병사단참모부 지령, 준비명령 하달 - ‘병사들은 6. 24, 19:00까지 식사종료 후 준비할 것’ - ‘23:00에 공격선 도착 및 공격 준비할 것’ ▶ 주요 증언 - ‘김일성이 전쟁 시작’(소련수상 후르시초프 회고록) - ‘내가 남침 선제타격계획 작성’ (소련으로 망명한 전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 |
2 유엔군 참전 · 지연전 (1950. 6. 29 ~ 9. 14)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막아내지 못하면 죽음’이라는 각오로 싸웠고, 수 많은 학생들과 해외동포들도 조국을 지키기 위한 일념으로 전투에 참가하여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였다.
최초로 투입된 유엔군 스미스부대 낙동강 방어전투
3 인천 상륙작전 · 서울수복 (1950. 9. 15 ~ 9. 30)
맥아더 장군은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인천을 장악한 후 서울로 진격하였고, 낙동강 방어선의 국군과 유엔군도 총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였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맥아더 장군 9·28 서울수복
4 38선 돌파 · 북진 (1950. 10. 1 ~ 10. 24)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0월 1일 38도선을 돌파하여 10월 19일 평양을 탈환하였고, 11월 21일에는 혜산진까지 진격함으로써 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 하였다.
국군(3사단) 38도선 돌파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국군병사
6·25전쟁의 깊은 상처는 6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6·25전쟁으로 300만명의 인명 피해와
1,000만여명의 이산가족, 수많은 상이군인, 전쟁미망인,
전쟁고아 등이 생겨났고, 전국토가 초토화되었다.
5 중공군 개입 · 새로운 전쟁 (1950. 10. 25 ~ 1951. 7. 9)
1950년 10월 19일 중공군의 참전으로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재반격을 시도하여 38도선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전선에 투입되는 중공군 흥남 피난민 철수선
6 휴전협상 · 고지쟁탈전 · 정전 (1951. 7. 10 ~ 1953. 7. 27)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을 시작하였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현재의 휴전선이 결정되었다.
치열한 고지쟁탈전 정전협정 조인식(1953. 7. 27)
우리를 도운 참전·지원 63개국 |
● 유엔군 즉각 참전 결의문 (1950. 6. 28)
“유엔 안보이사회는 북한군대의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 공격을 평화의 파괴행위로 규정하였으며, 북한당국에게 전투를 즉각 중지하고 그들의 군대를 즉시 38도선으로 철수시킬 것을 촉구하였으며, 유엔한국위원단으로부터 북한당국이 전투를 중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과 국제 평화와 안전을 회복 시키기 위하여 군사적 조치가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대한민국이 평화와 안전을 보장할 효과적인 조치를 즉각 취하여 줄 것을 유엔에 호소하였음을 감안하여, 대한민국이 무력침략을 격퇴하고, 그 지역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여 줄 것을 유엔회원국에게 권고 하는 바이다.”
“6·25전쟁 당시 전 세계 93개국 중
우리를 도왔던 참전·지원 63개국을 고려하면
전 세계국가 중 68%가 한국을 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