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서 나의 정체성 확실하게 찾았어요” 육군수도포병여단 허승범 일병
육군수도포병여단 본부근무대 무전병으로 복무하는 허승범 일병이 야외훈련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요? 저하고는 관계없는 이야기입니다. 저의 정체성을 찾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으니까요. 더불어 탄탄한 몸매까지 만들어 가고 있으니 1석 3조 아닌가요?”
육군수도포병여단 본부근무대 정보통신과에서 무전병으로 복무하는 허승범(31) 일병은 입대 전까지 한국인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학업과 일을 병행하던 아버지와 미국 영주권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 국적의 엘버트 리 허였다. 태어난 것만 미국이 아니라 미국에서 중ㆍ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마쳤다. 엘러간이라는 미국 제약회사에서 직장 생활도 했다.
그런 허 일병이 부모님의 나라인 한국 국적을 취득한 건 지난해 4월 21일. 군에 입대하기 위해서였다. 허 일병은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 두 달이 채 되기 전인 6월 14일 입대했다.
허 일병에겐 미국 시민권자라는 독특한 이력 외에도 남다른 배경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해열진통제 ‘부루펜’을 생산하는 중견 제약회사 삼일제약의 최대주주인 할아버지와 최고경영자인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것.
美 국적 포기 자원 입대…무전병 복무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 갖은 편법을 동원해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려고 하는 현실에 비해 중견기업가의 집안에서, 그것도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될 미국시민권자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젊은이로서의 책임을 다하겠다고 자원해 군에 입대했다.
이 정도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해도 될 만하지만 허 일병은 “절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고 싶었죠. 저 혼자 미국인으로 살기보다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해 무늬만 한국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한국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외국 생활만 해서 한국의 문화나 생활을 접할 기회가 적었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김치나 찌개는 입에도 대지 못했다는 허 일병.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 음식을 더 좋아하게 되는 제 모습을 보면서 피는 못 속이는 걸 새삼 느꼈다”며 “군 생활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늦은 나이에 군에 입대하는 것에 대한 가족들의 만류도 만만치 않았다는 게 허 일병의 설명이다.
허 일병은 “해병대 출신인 아버지조차도 처음엔 그냥 미국에서 살라고 했을 정도였지만 저의 확고함에 마음을 돌려 든든한 응원자가 돼 주셨다”며 “나중엔 아버지가 많은 조언도 해 주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이야기해 주는 등 힘이 돼 주셨다”고 말했다.
어렵게 입대한 허 일병이었지만 군대생활이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동료 전우들보다 10살이나 많은 나이에다 사회생활을 6~7년 이상 하면서 관리하지 못한 허 일병의 체력은 바닥일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더해 누구보다 성숙해 있을 줄 알았던 정신력도 여자친구와의 이별, 친구들의 결혼소식, 회사동료들의 진급 소식을 접하면서 많이 흔들렸다는 게 허 일병의 말이다.
허 일병은 “이등병 시절에는 많은 혼란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과정을 이겨내면서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으로 무장했다”며 “제대 후에 어떠한 힘든 상황이 닥치더라도 침착하게 이겨 낼 자신감이 생긴 것은 군에 와서 얻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또 허 일병은 “100㎏에 육박하던 몸무게도 1년이 채 안 되는 군생활을 통해 10㎏가량 줄였다”며 “남은 군생활 동안 더욱 열심히 운동해 탄탄한 복근을 자랑하며 사회에 복귀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허 일병은 “늦은 나이에 입대를 결정하는 게 쉽지 않을 것임에도 21개월 병영생활 또한 많은 시련과 고통을 요구하겠지만 ‘고통 없이는 얻는 것이 없다(No Pain No Gain)’는 말처럼 정말 소중한 경험”이라며 “대한민국 청년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는 자부심과 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수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