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에 빛나는 애국전사들
국가보훈처가 11월의 6ㆍ25 전쟁영웅과 독립운동가로 각각 김옥상 육군일병, 문석봉 선생을 31일 선정했다. 11월의 호국인물에는 최성모 해군 소령이 선정됐다.
김옥상 육군 일병(1928.7∼1950.11)은 6ㆍ25전쟁 중 단신으로 육박전을 전개해 다수 적을 물리친 공을 인정받았다. 1950년 11월 국군 제7사단 제5연대 소속으로 평안남도 개천 비호산 전투에 참가한 김 일병은 적의 전초진지에 접근해 정찰하던 중 적 1개 소대 병력과 싸워 다수를살상하는 전과를 올리고 전사했다.
김 일병의 살신성인으로 제5연대는 전날 빼앗겼던 비호산 고지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제7사단은 사흘간 격전 끝에 중공군 2개 사단을 물리치고 끝까지 진지를 고수해방어에 성공함으로써 유엔군이 청천강 북안에서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54년 6월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문석봉(1851.12~1896.11) 선생은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유성에서 처음으로 의병을일으켜 일본에 항쟁한 인물이다. 경북 현풍군(현 달성군 현풍면)에서 출생한 선생은 1882년 관리생활을 시작한 후 세곡을 운반하던 중 기근에 시달리던 전라도 주민에게 곡식을 전달했다가 면직됐다.
1893년 5월 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11월 '양호소모사'에 임명되어 활동했으나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을 토벌한다는 고발로 구금됐다.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을 목격하고 일본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관병을 훈련한 것이 적발됐다. 1895년 6월 석방되어 명성황후 시해소식을 듣고 복수를 위해 9월18일 공주의 유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회덕현을 급습해 무기를 빼앗아 300여명의 의병을 무장시키고, 10월 공주로 진격했으나 관군에 패했다.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비했으나 대구부에 구금됐고 이듬해 봄파옥하고 탈출했다. 선생은 원주에서 각도 의병장들과 통문을 주고받으며 봉기를 모의하다가 병에 걸려 1896년 8월 현풍으로 귀환했으나 그해 11월 숨졌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호국인물론 선정된 최성모 해군 소령(1931.12∼1962.4)은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1955년 해군 소위(해사9기)로 임관해 701함 포술장과 203함 부장, 707함 부장 등을 지냈다.
최 소령은 1962년 4월27일 707함 항해 당직사관으로 동해 경비를 서던 중 오전 1시45분께 북으로 항로를 돌릴 것을 위협하는 최방순 수병을 회유하다 최 수병이 쏜총탄 3발을 맞았다. 복부에 치명상을 당한 그는 함장실까지 기어 내려가 함장에게 이를 보고한 뒤 의식을 잃었고, 오전 6시15분께 숨을 거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충무무공훈장과 함께 소령으로 1계급 특진을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