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 인천으로 642명 들어와 전투 참가 공세워
"후방 경계근무 싫다" 독자 전투부대 결성… 휴전뒤 일부 일본 못 가
생존 63명… 인천 5명… 학도의용군 참전비, 수봉공원에 세워져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국(이집트·시리아·요르단) 사이에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재외 이스라엘 청년들은 앞 다퉈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달려가 예루살렘 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각국 언론은'세계 최초의 재외국민 참전'이라며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해외 거주 국민의 참전은 대한민국이 먼저다.17년이나 앞선 1950년 6·25전쟁 때 642명의 재일교포 청년학도들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해 전선에 뛰어들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하자 1000명이 넘는 청년들은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에 참전 지원을 했다. 신체검사 등을 거쳐 18세 고등학생부터 45세 중년까지 총 642명이 최종 선발됐다. 여성 지원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한국행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 ▲ 6.25에 참전하기 위해 지원한 일본 도쿄 출신 학도병들의 기념사진.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제공
나흘 동안의 기초 훈련을 마친 1진 78명은 9월 12일 요코하마항에 도착해 군용 수송선 피닉스호에 승선했다. 이들에게는 군번과 계급이 부여되지 않았다. 'S.V.(Student Volunteer) FROM JAPAN'이라는 견장 표시가 유일했다. 현해탄을 넘은 재일학도의용군은 9·15 인천상륙작전 이틀 후인 9월 17일 인천 땅을 밟았다. 꿈에 그리던 조국 땅에 상륙한 것이다. 2진 266명은 9월24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옛 올림포스호텔 주변 해안가에 상륙했다. 바닷가에서 하루 야영하고 이튿날 송림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해 몇 십명씩 흩어져 미군 각 부대에 배속됐다.
이어 3진 101명이 10월 5일 인천항에 도착하는 등 4, 5진이 잇따라 참전하게 된다. 그들은 미군과 함께 원산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등에 투입돼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한편 부평 미군병참기지에 배속된 의용군은 후방부대 경계 등으로 전투병에서 배제되자 참전 목적에 어긋난다며 독자적인 전투부대인 '3·1대대'를 결성했다. '3·1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를 담았다.
재일학도의용군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무려 135명(전사 52명, 실종 83명)이 희생되었다. 휴전협정 테이블에서 북한군 대표들은 일본군이 참전했다며 거세게 항의했다. 한국말이 서툴고 일본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생포된 의용군을 증거로 내세운 것이다.
휴전이 되자 생존한 의용군들은 부모 형제가 있는 일본으로 귀환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내세워 의용군을'허가받지 않고 임의 출국한 자들'로 규정하고 입국 자체를 불허했다. 미군의 주선으로 265명이 가까스로 돌아갔고 242명은 졸지에 '국제 미아'로 전락했다가 고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조국에서 산화한 동지들의 넋을 위로하기위해 1956년 그들이 처음 조국 땅을 밟은 월미도에 충령비를 세우려고 했으나 그곳에 군부대가 주둔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1979년 인천 앞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수봉공원에'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를 세웠다. 기념비 앞에는 '강공래'부터'황평길'까지 642명 대원의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이 놓여 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2011년 1월 현재, 국내 거주 38명, 일본 거주 25명 등 63명이 생존해 있다. 인천에는 5명의 대원이 살고 있다. 대부분 80세 이상 고령으로 이제 그들의 애국혼은'신화'로 남아 역사책에서나 만날 날이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