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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겪은 6·25-대한민국카투사전우회 고문 이정환 예비역 대령

육군5군단전우회 2011. 6. 27. 21:44

지평리 전투로 자신감 되찾아 북진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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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78·예비역 대령·사진) 대한민국카투사전우회 상임고문의 하루 중 ‘War Room’에서의 시간은 빼놓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War Room’은 6·25전쟁과 관련된 각종 전쟁 자료들을 모아 그가 명명한 방 이름. 이 고문은 여기서 전쟁기록물들을 보면서 죽음과 대면해 생사를 넘나들며 적과 싸우던 현장을 찾아간다.

 

그는 1950년 미 제1기갑사단 카투사 소속 학도병으로 입대해 지평리 전투를 거쳐 휴전 직전인 금성지구 전투까지 참가한 역전의 용사다.

 

이정환 대한민국카투사전우회 상임고문이 1951년 11월 미 제1기병사단 소속으로 근무할 당시 모습.

한미 장병들이 1950년 10월 미군 전차를 이용, 한강을 건너고 있다.

 

▶입대, 그리고 전선 투입

황해도 벽성군이 고향인 이 상임고문. 그는 전쟁이 나자마자 피란길에 올랐다. 당시 남한 측 영토였던 그의 고향은 북한의 발길이 닿지 않았지만 북한 치하에서의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화를 피해 남으로 남으로 내려오다 도착한 곳이 부산. 여기서 그는 운명의 갈림판을 만났다. 부산진역 광장에 마련된 유엔군 모병소의 게시판을 보게 된 것이다. 게시판의 다른 내용은 눈에 띄지 않았다. 중학교 4학년 이상이면 입대할 수 있다는 구절만 눈에 크게 들어왔다. 그 자리에서 입대서를 썼다.

“이대로는 나라가 위험해서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허무하게 잃어버린 고향 땅과 부모님을 만나야겠다는 소원도 작용했지요.”

이후 그는 신설된 구포 제3신병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즉시 대구전선에 투입됐다. 전쟁 중이라 훈련은 매우 짧게 진행됐다. 훈련 내용이라고 해 봐야 5일간의 제식훈련과 사격 5발뿐이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위급한 시기였다.

카투사는 6·25전쟁 발발 후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7사단의 인원 보충을 위한 징집에서 시작됐다. 일본으로 보내기 위한 인원의 징집은 1950년 8월 15일을 전후해 실시됐다. 주로 피란민이 많이 모여 있던 대구와 부산 등지의 거리에서 불시 검문을 통한 강제징집으로 확보됐다. 약식 신체검사만 받고 매일 2000명이 일본으로 보내졌다. 이 시기 미 제7사단에 배속된 카투사들의 군번은 ‘K-’로 시작됐다. 이런 징집 과정을 거쳐 1950년 8월 16일 아침 최초의 카투사라고 할 수 있는 인원 313명이 일본 선박으로 부산을 출발해 8월 18일 오후 일본에 도착했다. 8월 24일 일본의 요코하마에 마지막 신병 보충선이 도착했고, 한국인 보충병은 8625명에 달했다. 그 후의 미군 부대에 대한 인원 보충은 구포에 있던 제3신병훈련소 출신으로 충당됐다.

“최초 배치받은 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 제82야전포대대 A포대였습니다. 당시 위치가 대구시 교외에 있는 과수원 가운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55㎜ 유탄포의 장약수 조수가 첫 임무였는데, 9월 22일까지 낙동강을 향해 있는 대로 포를 쏘아 댔어요. 주로 고령과 다부동 쪽으로 포사격 지원을 많이 했지요.”

▶짜릿한 승리, 이어진 철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단번에 역전됐고,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의 교착 상태 역시 끝났다. 9월 23일 북진이 시작됐다.

“상주·보은·청주·천안·평택·오산·수원까지 포 한 발 안 쏘고 말 그대로 주마간산 격으로 노량진에 도착했어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10월 8일에는 개성을 통과했다. 북진을 거듭해 평양 턱밑의 중화지구에 진입했다. 평양 방위를 위한 방어시설은 거창했다. 하지만 적의 저항은 없었다. 이미 인민군은 도주해 한 명도 없는 빈 상태였다.

그리고 10월 18일 마침내 이 상임고문도 평양에 입성했다. 이후 미 제1기병사단은 숙천에서 안주, 청천강을 건너 박천·영변으로 진격해 운산에 못 미치는 용산동까지 이동했다.

통일은 곧 이뤄질 것 같았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은 전쟁의 향방을 다시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 상임고문의 부대가 용산동에 도착하기 전 운산에 도착한 한국군 제1사단 제15연대를 지원하려던 미 제8기병연대가 중공군에 포위돼 제3대대가 괴멸되고 대부분의 병사는 포로가 됐다.

“용산동의 포 진지에서 우리는 운산시가를 향해 있는 대로 포탄을 계속 쏘아 댔어요. 그때 봤던 패주하는 부대와 병사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12월 5일 눈물을 머금고 평양을 철수했다. 적에게 넘겨 주지 않기 위해 남아 있던 보급품과 연료, 탄약 등 군수물자를 모두 없앴다. 당시 파괴된 군수물자에 의한 연기와 화기로 뒤덮였던 평양비행장의 하늘이 지금도 떠오른다고 했다. 1951년 1월 초순 미 제1기병사단은 경북 상주선까지 후퇴하게 된다.

▶지평리 전투와 한국군 복귀

1951년 1·4 후퇴 직후인 1월 25일 유엔군의 선더볼트 작전으로 재반격전이 시작됐다.

당시 이 상임고문이 소속된 미 제1기병사단은 양평 근처 한강변에서 지평리 전투를 치르고 있던 미 23연대를 포 사격으로 지원했다.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 제2보병사단 23연대와 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 39군(4개 사단 규모)과 3일간 벌인 이 격전에서 유엔군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에게도 잊지 못할 전투였지만 이 상임고문은 지평리 전투를 6·25전쟁의 전환점(turning point)으로 평가한다.

“지평리 전투 이전까지 미군이 중공군의 공세에 포위된 상태에서 방어전에 성공한 적이 없었어요. 지평리에서 미군과 프랑스군이 주축이 된 유엔군이 승리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실제 1950년 말의 연이은 패배로 떨어졌던 유엔군의 사기가 이 사건을 계기로 다시 고무됐다. 자신감을 되찾은 유엔군은 북진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는 이 당시의 경험과 각국의 자료를 토대로 지평리 전투의 경과를 재구성한 ‘지평리를 사수하라’를 집필, 세상에 널리 알린 바 있다.

이 상임고문은 1952년 12월 미 제1기병사단이 일본으로 교대·배치됨에 따라 한국군으로 복귀했다. 이어 포병사령부에서 포병 사격지휘 과정을 수료하고, 갑종간부 후보생으로 공병장교로 임관했다. 그리고 1953년 7월 13일부터 7월 27일까지 금성지구 전투에 참가했다. 7·13 공세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전투는 사실상 휴전을 앞두고 벌어지는 최후이자 최대의 전투였다. 중공군 4개군 산하 12개 사단이 한국군 5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금성 지역의 돌출부에 대한 최후 공세를 감행한 전투에서 그는 1개 소대를 인솔해 육박전을 감행, 적의 대전차 진지를 폭약 800파운드로 폭파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전과를 인정받아 소대원 전원이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다.

▶카투사와 6·25전쟁

6·25전쟁 당시에는 카투사와 미군 간에 감정과 문화적인 차이로 미군들이 카투사를 ‘ROCK’이나 ‘GOOKS’라는 비하 언어를 사용해 폄훼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60년이 지난 지금 양국 간의 관계는 ‘Thanks KATUSA’라는 문구가 대변하듯이 상호 신뢰의 관계로 발전했다. 우리도 그만큼 노력했고 미군도 이해하고 인정해 줬기 때문이다.

지금도 전쟁 당시의 전사자들을 추모하며 지낸다는 이 상임고문에게는 간절한 소원이 하나 있다. 전쟁기념관 회랑에 있는 전사자 명비에 추가 명단을 각인해 주는 것과 카투사 백서 제정을 위한 관련 자료들의 공개다.

6·25전쟁 당시 카투사 참전용사들의 활약과 전공이 올곧이 평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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