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와 한국전쟁 - 육군종합행정학교 김흥락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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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락 육군종합행정학교 교수 khrag@dreamwiz.com |
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도선 이북에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대가 남침했다. 삽시간에 개성이 무너지고 동두천과 의정부 일대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잃었다.
대전이 떨어지고 이내 낙동강 선까지 밀렸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켜 서울을 탈환하고 평양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압록강까지 진격해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려는 순간, 이게 웬 날벼락인가. 중공군이 개입하니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중공군의 인해전술 앞에서 유엔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할 때까지 쌍방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3년 1개월이 지나서야 휴전협정에 서명한다.
전쟁의 결과는 참담했다. 한반도가 폐허로 변했다. 100년도 아닌, 불과 반세기 전에 이 땅에서 일어난 일이다.
‘전 조선의 공산주의 사회 실현’이라는 미명하에 김일성이 일으킨 이 전쟁은 이름도 다양하다.
북한은 ‘조국해방전쟁’으로 부른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고도 ‘남한에서 미제를 몰아내고 남한 민족을 해방하는 전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의도다.
중국은 미국에 대항하고 북조선을 돕는다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이라 하고, 일본은 ‘조선전쟁(朝鮮戰爭)’으로 부른다. 미국도 ‘잊힌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 하는 등 관점에 따라 달리 부르고 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6·25사변이라 부르기도 하고 6·25동란 또는 한국동란으로 부르기도 했다. 최근에는 ‘6·25전쟁이냐, 한국전쟁이냐?’며 의견이 분분하다. 처음에는 6·25사변으로 불렀는데 점차 6·25전쟁으로 굳어졌다.
1980년대 들어 해외에서 유학한 정치학자들이 외국 문헌의 ‘Korean War’를 ‘한국전쟁’으로 직역해 보급했고, 진보 진영에서 민주화 투쟁 시국을 이용해 널리 확산시켰다.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규정한 명칭은 ‘6·25사변’이다.
국사 교과서와 표준국어대사전은 ‘6·25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사변(事變)이란 전쟁까지는 아니지만, 병력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는 국가적 사태나 난리 또는 선전포고 없이 일어난 국가 간의 무력충돌을 뜻하고, 전쟁(戰爭)은 국가와 국가 또는 교전 단체 사이에 무력을 써서 하는 싸움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6·25가 사변보다 전쟁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6·25전쟁인가, 한국전쟁인가?’하는 문제가 남는다.
전쟁의 시기나 주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6·25전쟁’으로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여기에는 전쟁이 시작된 날짜만을 명시하는 한계가 있다.
사회 일각에서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주장하는데, 북한의 전쟁 책임을 강조하는 ‘6·25전쟁’은 냉전적 시각이 담긴 표현이므로 이데올로기적 편견이 없는 ‘한국전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우리 대한민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완전한 용어가 정립되기 전까지는 ‘6·25전쟁’으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6·25로 말미암아 남북 간에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됐고, 이로 인한 한반도 분단이 고착화돼 지금도 분단국가로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전쟁이란 나라가 강하면 물러나고 약하면 문전으로 찾아드는 법! 6·25는 끝나지 않았다.